
상상해보세요, 당신의 모든 빚이 사라지는 날을
아침에 눈을 떴는데 휴대폰 문자 메시지가 와 있습니다. “축하합니다! 회원님의 모든 은행 대출과 신용카드 빚이 전액 탕감되었습니다.” 상상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고 온몸의 무거운 짐이 날아갈 듯한 기분이 들지 않으시나요?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것이 경제의 기본 원칙이니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인류 문명의 시원인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이러한 ‘꿈같은 일’이 주기적으로, 그것도 합법적으로 일어났습니다. 바로 고대 사회를 지탱했던 위대한 부채 리셋 제도, ‘희년(Jubilee)’ 이야기입니다.
부채: 고대 사회를 파멸로 몰고 가는 무서운 병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농업을 기반으로 번영했습니다. 하지만 농업은 기후 변화에 너무나 취약했지요. 흉작이 들거나 가뭄이 오면, 농민들은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영주나 부유한 상인들에게 높은 이자를 내고 곡식이나 돈을 빌려야만 했습니다. 고대 사회의 이자는 오늘날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높았고, 한 번 빚의 늪에 빠진 농민들은 평생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려웠습니다.
빚을 갚지 못한 농민들은 영주에게 토지를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했습니다. 심지어 소작료를 내지 못하면 자신과 가족의 몸을 담보로 바치고 ‘부채 노예’가 되어야 했지요. 빚 때문에 자유 시민이 노예가 되는 비극은 사회적 분노를 극에 달하게 만들었고, 공동체를 내부에서부터 썩어 들어가게 만들었습니다. 노동력은 고갈되었고 영주들의 토지 독점은 심화되었으며, 사회는 내전으로 파멸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함무라비의 해법: 주기적인 부채 탕감 선포
사회 시스템이 완전히 붕괴하겠다는 위기감이 팽배해졌을 때, 바빌로니아의 위대한 왕 함무라비는 ‘함무라비 법전’을 통해 획기적인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바로 ‘미샤룸(Misharum)’ 혹은 ‘아마르기(Amargi)’라고 불리는, 주기적인 부채 탕감령이었습니다. 이 용어는 우리말로 ‘정의’ 혹은 ‘어머니에게로의 복귀(자유)’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함무라비 왕은 즉위 초기나 혹은 특정한 시기(약 7년~10년 주기)에 법령을 선포하여, 시민들이 진 모든 곡식이나 돈 부채를 전면적으로 무효화(탕감)했습니다. 또한 빚 때문에 노예가 되어 팔려 나갔던 자유 시민들을 해방하고, 저당 잡혔던 농토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의 시선으로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그야말로 ‘사회의 모든 신용 리셋’이었습니다.
왜 cancelled debt? 국가 서바이벌을 위한 이성적인 선택
그렇다면 함무라비 왕은 왜 이러한 파격적인 부채 탕감 제도를 도입했을까요?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자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고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아주 지극히 이성적이고 정치적인 ‘서바이벌 전략’이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노동력 확보’와 ‘군사력 유지’였습니다. 고대 사회의 힘은 농사를 지을 사람과 전쟁터에 나갈 군인의 수에서 나옵니다. 빚 때문에 농민들이 노예로 전락하여 영주의 사적인 재산이 되어버리면, 국가는 이들을 더 이상 생산 인구나 군인으로 활용할 수 없게 됩니다. 함무라비 왕은 부채 리셋을 통해 영주의 손에 있던 노동력을 다시 ‘국가(왕)’의 통제 아래로 가져온 것입니다.
또한, 빚에 지쳐 절망한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키거나 외세와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주기적인 희년 제도는 사회적 분노를 가라앉히는 ‘안전밸브’ 역할을 했으며, 평민들이 스스로 생계를 책임질 수 있게 된 자조 농민층을 형성하게 되어 국가 민주주의의 허리(중산층)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연결고리] 고대의 희년 잔혹사가 현대 자본주의 시장에 주는 메시지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희년 제도는,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에서 ‘신용’과 ‘부채’가 어떻게 공동체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역사적 교훈입니다. 빚에 짓눌린 사람을 평생 죄인으로 묶어두는 것보다, 합법적으로 재기의 기회를 주어 다시 사회의 건강한 생산 인구로 복귀시키는 것이 공동체 전체에 훨씬 유익하다는 자본주의의 지혜는 사실 4000년 전 함무라비의 철학에서 이미 시작된 셈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오늘날의 금융 시장을 돌아보게 됩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도 빚을 감당하지 못해 고통받는 개인을 구제하기 위한 ‘개인회생’, ‘파산 제도’ 혹은 ‘채무 조정 프로그램’이 존재하지 않나요? 또한, 국가 간 부채 위기가 발생했을 때 국제기구(IMF 등)가 개입하여 부채를 탕감하거나 만기를 연장해 주는 조치들은, 본질적으로 희년의 메커니즘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자산의 명목적인 수치보다 실제 재화와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인적 자본’의 생산성과 구매력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과도한 부채 팽창은 결국 시스템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위험성을 고대의 희년 잔혹사는 오늘날의 현명한 투자자들에게 묵직한 통찰을 전하고 있습니다. 명심하세요. 진정한 부는 창고에 쌓인 돈이 아니라, 끊임없이 돌아가는 생산 시스템과 인간의 존엄성에서 나옵니다.